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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백번의 국민대신문을 통해본 지난 국민대의 생활사 | |||||
글쓴이 | 06.01.07 | 날짜 | 김선형 | 조회수 | 33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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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내용
그 후로 58년이 지난 2006년 1월 1일, 국민대학교는 환갑을 맞이했고 국민대학교의 신문은 8백 번째 신문을 발행했다.
학내의 소식을 비롯, 사회문제까지 아우르는 학내의 소식지는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國民大學報라는 세로 제호는 가로쓰기가 보편화 되어 가로제호가 등장했고 이후 국민대신문으로 이름이 변경되고 국내의 대학신문 중 가장 파격적인 디자인의 제호로 눈길을 끌고 있다.
▲다음은 국민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지난 1백호 간의 국민대신문의 주요내용이다.
100호 (1968년 12월 10일자)
‘現代식 시설로 올해 3월까지 세워질 校舍’
사진에 지금의 본부관의 모습이 찍혀져있으나 무언가 조금 어색하다. 이유인 즉, 이때 지어진 본부관은 한 번의 리모델링을 또 겪었기 때문이다. 2005년 9월 5일자(794호)에 종합복지관이 완공된 기사가 나고 최근 학생회관 리모델링 중인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학교의 발전은 계속 되고 있다.
200호 (1975년 11월 26일자)
‘學事日程대로 正常수업’
학사일정대로 정상수업이 이뤄져 충분한 수업일수를 채우고 겨울방학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기사. 지금 생각에 이것이 무슨 기사거리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학원소요가 계속되던 이때는 한학기의 수업일수를 다 채웠다는 것 자체가 큰 이슈가 되었다.
300호 (1980년 9월 9일자)
‘本校, 大望의 綜合大學 昇格’
개교이래 최대의 숙원사업, 종합대학승격의 꿈을 이룬 학교는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다. 특히 문교부는 대학운영종합평가와 함께 대학민국 최초의 민족사학이라는 점을 높이사 우리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1980년 8월 29일 발표)시켰다는 데에 더욱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400호 (1985년 4월 9일자)
‘80년대 한국 노동실태진단’
학생운동이 최고조를 이루던 이때, 대학생들은 한국의 노동자와 통일문제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사회과학서적을 읽었고 학생들은 한국정치의 낙후성에 대한 견해를 토해냈고 학보는 그것을 대변했다.
500호 (1989년 4월 17일자)
캠퍼스유감, ‘합목적인 운용과 일체감 양성이해는 하지만…’
학보의 외향이 세로쓰기에서 벋어나 한글위주의 가로쓰기로 변했다. 외향뿐 아니라 내용도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물론 학내문제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식당밥이 맛없다고 하기 전에 학생들도 식당을 깨끗이 쓰는 식당문화를 만들자’는 독자투고로 신문이 3백번 더 나올 동안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불만 ‘식당의 음식맛’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다.
600호 (1993년 4월 6일자)
‘중앙도서관 자유열람실 1천 2백석 개방’
성곡기념도서관과 성곡도서관 중 명칭결정을 고심하고 있다며 이전의 중앙도서관(현재 조형관)에서 새도서관으로 각종 도서 등 자료가 옮기고 있다는 기사가 개재되었다.
컴퓨터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라 학보는 ‘컴퓨터와 생활’이라는 코너를 만들어 컴퓨터를 배우기 위한 방법을 실어 당시 최첨단 뉴스를 알려주었다.
700호 (1999년 4월 12일자)
‘Y2K문제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75%’
당시의 최대 이슈는 뉴밀레니엄을 맞이하며 생길 문제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전산정보팀은 Y2K를 대비하여 특별팀을 조직하였고 학생들은 7자리 학번이 9자리로 바뀐다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어떤 학생들은 Y2K문제로 모든 학점이 A로 나올 것이라고 야무진 꿈을 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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